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문령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당나라 영역에 복속된 지방에서 많은 고구려계 유민들은 [[당나라]]의 감시 하에 여러 차례 강제 이주되었으며 당나라의 성방[* 당이 이민족들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조영]]이 이끄는 집단도 여기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에 [[검모잠]] 등이 일으킨 고구려 부흥운동을 크게 진압한 후였고,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들이 추가 반란을 일으킬 것에 우려하여 유민들을 계속 감시하였다. 이로 인해 당나라 경내의 고구려 유민들은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키지 못하고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696년, 상황이 급변하였는데 당시 [[거란|거란족]]의 추장 [[이진충]]이 당을 계승한 무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시기에 대조영 집단은 [[걸사비우]]의 [[말갈족]]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의 옛 고구려 땅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갔다. 무주 조정은 결국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당시 대조영은 이미 요동 지방에서 크게 세력을 키운 후였고, 이들과의 정면 충돌에서 일어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무주의 [[측천무후|성신황제]]는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당 왕조에서 국공은 '''종1품'''에 포함되며, 사왕(嗣王, 계승을 받은 왕), 군왕(郡王) 아래의 3번째 직위였다. 당의 체계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은 무주에서도 많이 다르진 않았다.]에 봉하였다. 한낱 유민들의 지도자인 대조영과 말갈족인 걸사비우에게 이러한 엄청난 조건을 내세운 점을 통해 당시 이들의 세력이 무주 조정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조영은 무주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행보의 의지를 명확히 했다. 그러자 무주는 이들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중랑장 색구와 거란군에서 항복한 거란인 장수 [[이해고]]를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겸 연공(燕公)[* 이해고에게 연공의 작위를 내린 건, 연 지역이 거란에 포함되어 있는 것 이외에도 대조영 세력의 근거지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대조영 세력과 거란을 싸우게 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는 전형적인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으로 삼아 공격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